최 완수/미술사가,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최 완수 씨의 어머니 정 경 씨는 탐미적이고...

올해로 여든여섯 살이신 우리 어머니는 지금도 60년 전 내가 태어나던 때의 얘기를 어제 일인 듯 말씀하신다. 그 내용은 대강 다음과 같다.

"개산 문다래미 쪽에서 큰 별이 떠 있다가 내 품안으로 달려드는데 큰 불덩이 같아. 그런 꿈을 세 번이나 꾸고 나서 태기가 있었지. 낳아 놓고 보니 두 눈에서 그때 보았던 별빛과 같은 서기가 일고 있지 뭐여. 불을 껐는데도 방안이 환하더라니까."

그래서 그런 남다른 아이를 키워 제 길을 가게 하기 위해 90 평생을 헌신해 오셨다. 성정이 까다로워 목욕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지 않으면 젖도 먹지 않고 울어 대기만 하였다니 그 고초가 얼마나 심하였겠는가. 처음에는 왜 우는지 알 수 없어 주변의 경험이 다 동원되고 의사까지 왕진을 오게 했으나 의사를 맞기 위해 새 옷으로 갈아입자 언제 울었더냔 듯이 환하게 웃으며 젖을 빨아 그 까닭을 알았다 한다. 그래서 나는 항상 깨끗하게 빨아 다린 옷을 단정하게 입고 젖을 물리고 있던 어머니의 모습을 머리 속에 간직하고 살게 되었던 모양이다.

내가 태어난 곳은 충남 예산군 고덕면 지곡리 용머리라는 동네이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천석꾼 부자 소리를 들으실 때 마련해 놓은 터였기 때문에 뒷동산에는 왕솔밭이 우거지고 앞들에는 기름진 논밭이 널려 있으며 그 사이로 시내가 마을 앞을 휘돌아 나가고 있는 그런 곳이었다. 바로 내포평야의 중심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개산이라 부르는 가야산 줄기가 오서산에서 서쪽으로 향했다가 북쪽으로 꺾이어 당진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남쪽으로 되돌아 나온 끝자락이 내포평야의 중심인 구만평야와 만나는 곳이 내가 태어난 용머리이다.

그래서 내 집 앞을 흐르는 용머리내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가 반대로 남쪽 오서산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오고 있는 삽교천 본류와 구만평야의 중심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서쪽에서 남북으로 길게 가로누운 가야산 줄기의 골짜기들마다에서 흘러내린 물줄기들도 동쪽으로 흘러들어 모두 이 구만평야에서 만나게 되니 구만리는 일찍부터 쌀 9만 석이 나서 구만리라 했다는 속설이 있을 정도로 넓고 기름지며 농사짓기 좋은 곳이었다.

이 넓은 구만평야를 생활터전으로 삼기 위해 그 너른 들이 내려다보이는 산자락 끝을 차지하고 가야산을 맞바라다볼 수 있는 서쪽 산밑에 숨듯이 자리잡은 것이 우리 집이었다. 그래서 가야산으로부터 별이 떨어져 어머니 품속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 집안은 본래 풍류를 즐기고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며 자연을 사랑하는 탐미적인 기질을 전통으로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태어났을 때는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가 이미 몇천 평 규모의 과수원을 꾸며 놓고 꽃과 열매를 즐기며 살고 있었다. 가장 높은 곳에 너른 누마루 대청이 딸린 집 한 채를 지어 놓고 철따라 손님을 청하다가 풍류잔치를 벌이고 꽃과 과일을 완상하며 달과 바람과 벗하고 계셨었다.

분합문을 천장 가까이 달아맨 것을 잘못 건드리어 떨어뜨린 사고나 대청 삼면에 나 있던 툇마루 난간을 잡고 거꾸로 매달리다 누마루 아래로 떨어진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아울러 풍류잔치를 위해 꽃게나 갑오징어, 민어, 조기와 같은 생선이 가마니로 들어와 우물가에서 부려지던 신나는 정경이 눈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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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뒤로는 항상 기화요초가 난만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고 뒷동산과 앞내 주변은 산야의 꽃들이 늘 만발해 있었다. 아마 나는 말을 배우면서부터 그 꽃이름들을 함께 익혀 나갔던 듯하다. 유난히 탐미적인 기질을 타고나 자연의 아름다움은 물론이고 그림이나 글씨, 하다못해 교과서 속에 들어 있는 삽도조차 아름다운 것이라면 늘 곁에 두고자 하였다.

그래서 일가 친척 가운데 학생이었던 이들이 잘못 책자랑 하다가 나에게 빼앗겨 그것을 되찾으려고 갖은 방법을 다 쓰던 일들을 지금도 만나면 서로 말하며 웃는다. 그리고 나는 어려서부터 나무 심고 꽃 가꾸기를 즐겨 하며 틈만 나면 집 주변 여기저기로 돌아다니며 나무를 심고 꽃모종을 옮기고 하였는데 그 버릇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이런 나를 우리 부모님은 무척 대견해 하셨다. 아마 1949년 봄이었을 것이다. 초등학교에 가고 나서 처음 맞는 봄이었으니 말이다. 그때는 9월 학기라 1948년 가을에 일곱 살로 처음 학교에 들어가고 그 다음 봄에 학교에 갔다 오다 일어났던 일로 기억하기 때문이다.

오전 수업을 끝마치고 과수원 문 안으로 들어오는데 길가 밭두둑에 내 키만큼 자란 복숭아나무에 겹복숭아 꽃이 가지마다 떨기로 피어나 있다. 그런데 마침 그 부근에 일꾼들이 일하다 놓고 간 연장들이 널려 있지 않은가. 책가방을 멘 채로 달려들어 이를 캐기 시작했는데 만만하게 보았더니 뿌리가 여간 깊지 않다. 무엇을 한 번 하면 끝장을 보고야 마는 성미인지라 얼마를 어떻게 씨름했던지 드디어 캐기는 캐내었다. 그런데 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질질 끌면서 집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아름다움에 취해서 내 방 앞에 심어 놓으려 아무 생각 없이 캐기는 캤지만 아무래도 잘못한 것 같아 마음이 찜찜한데 마침 아버지께서 걸어 나오시지 않는가. 별로 떳떳하지 못한 듯하여 어른들 눈에 안 띄었으면 했는데 눈빛 한 번만 고쳐도 온 집안이 얼어붙을 만큼 엄하신 아버지 눈에 정통으로 마주쳤으니 무사하지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본래 잘못이나 책임을 피하려 하지 않는 성미가 있는지라 호된 꾸중을 들을 각오로 계속 끌고 올라갔다.

아니나다를까 꽤 엄격한 목소리로 "너 그게 뭐냐" 하신다. 그래서 사실대로 말했다. 올라오다 보니 너무 아름다워 방 앞에다 옮겨 심으려고 캐내었다고. 그랬더니 뜻밖에 온화하게 웃으시며 어디 보자고 끌고 온 나무를 살피시더니 "몹시 애썼구나. 그런데 이 나무는 살기가 어렵겠다. 모든 식물은 꽃필 때 옮기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 거기에다 네가 캐면서 뿌리에 많은 상처를 주었으니 어떻겠느냐. 그렇지만 최선을 다해 심어 보자" 하시면서 내가 심고자 했던 곳에 손수 땅을 파서 정성스럽게 심어 주시면서 "네 정성으로 살아날지 모르니 물을 주고 가꿔 봐라" 하시고 자애로운 웃음을 남기며 나가신다.

나는 이때 아주 많은 사실을 깨달았다. 꽃필 때 식물을 옮겨서는 안 된다는 것은 물론 지나친 욕심으로 힘에 부치는 일을 해서도 안 되며 어른 허락 없이 독단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위험한 일인지 하는 것들을.

그 사이 우리 어머니께서는 나의 이런 탐미적이고 결벽성 있는 성품을 아시고 의복을 입혀도 품위와 법도를 잃지 않도록 배려하셨으니 우리 옷을 입힐 때는 언제나 두루마기를 갖춰 입히고 신발도 구두를 수제화로 주문해 신게 해주셨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이런 평화와 호사는 끝이 났다. 친하던 이웃 사이에 서로 죽고 죽이는 참극이 연출되는 동안 우리 집은 시국이 뒤집힐 때마다 불리해진 이웃들의 피난처가 되었고 이들을 수색한다는 명목으로 부근의 같은 얼굴들이 정반대의 목적으로 와서 몇 번 집뒤짐을 해서 가져갈 것은 모두 가져갔다.

그리고 나서 농촌의 피폐는 전면으로 확산되니 과수원은 이제 유일한 생계 수단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풍류의 현장이던 누마루 대청에는 농약과 비료부대가 쌓이고 걸리적대는 분합문은 아예 떼어내 한쪽 구석에 쌓아놓았다가 언제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게 되었으며 툇마루 난간은 비바람에 사그라져 하나 둘씩 떨어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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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세태의 변화 속에서도 우리 부모님은 내가 하고자 하는 공부를 시키기 위해 서울로 올려 보내 마음대로 공부하게 하였다. 그렇게 어렵게 시키는 공부였지만 세속적인 영달을 꿈꾸는 것과 아무 상관없는 역사 공부를 한다고 했을 때나 불교사 내지 불교미술사를 공부한다고 했을 때 한마디 말씀은커녕 실망하는 눈치하나 보이시지 않았다. 어찌 우리 부모인들 다른 부모와 같이 세속적인 부귀영화가 부럽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자식을 믿는 마음이 철석 같은 분들이었기에 하고자 하는 일을 자유롭게 하여 제 길에서 성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크셨기 때문에 당신들의 희망이나 요구를 깊이 접어두셨던 것이었던 듯하다. 뿐만 아니라 힘이 닿는 대로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니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 교복의 속박에서 벗어나 이제 우리 옷을 입을 수 있게 되자 이때부터 우리 어머니는 손수 옷을 지어 필요한 자리에 우리 옷을 입고 나서도록 하셨다. 그래서 서울대학교 개교 이래 처음으로 한복 정장을 차려 입고 나온 입학생이 생겨나게 되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때는 지금보다도 더 우리 것을 천시하여 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은 우리 것을 버리는 데 앞장선 사람이라는 고정관념이 팽배해 있을 때였다. 1961년이라는 해는 한국전쟁이 끝나고 나서 미처 10년이 지나지 않았고 사일구와 오일륙 혁명이 연이어 일어나 서유럽화, 곧 산업사회로의 전환을 강력하게 모색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족문화의 전통을 단절시키지 않고 우리 역사를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새로운 민족사관의 확립을 꿈꾸었으니 누가 보아도 시대착오적인 발상을 하는 광인의 행태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나의 부모님은 그런 나의 사고가 광명정대하다고 확신하고 계셨다. 그래서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하시며 행여 불우한 일생으로 끝나지 않을까 그것만 걱정하시었다. 그래서 가세가 극도로 기울어도 이를 알리지 못하게 하시었고 나 자신도 도움이 될 수 없는 처지라 모르는 척 외면하며 간송미술관에 처박혀 외부와 절연하면서 미술사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래서 결국 이런 세속적인 부담을 모두 내 아버지가 떠 안게 되고 이를 감내하지 못하여 겨우 예순두 살로 세상을 떠나시게 되었다. 불초자의 앞길을 가로막지 않겠다는 자애로운 마음이 세속의 고뇌를 가슴속에 묻어 두기만 한 탓에 이것이 화병이 되었던 것이다. 이때처럼 학문의 길이 무의미하게 느껴져 본 적이 없다.

그러나 가고자 하였던 길에서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아버지에 대한 불효를 만분의 일이라도 갚는 것이라는 어머니의 격려가 다시 용맹정진의 불씨를 되살려 놓았다. 그래서 불상 연구, 겸재 연구, 조선왕조 왕릉 조사 들을 계속하여 우리 역사를 바로잡는 일에 매진하여 끊임 없이 제자들을 길러 낼 수 있었다.

 
그러께 한 출판 기념회에서의 모습. 어머니를 서울로 모셔와...

그러는 사이에 형제들의 도움으로 어머니를 서울로 모셔와 살게 되었으나 간송미술관에 상주하고 있는 나는 실제로 어머니를 명절이나 제사, 생신 같은 특별한 날에 가 뵙는 것 이외에 곁에 뫼시지도 못하고 있다. 오히려 아흔이 다 되신 지금에도 다달이 의복과 음식을 챙겨 보내시며 혹시 불초자의 결벽성에 흠이 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시니 이런 큰 불효가 천지간에 또다시 어디에 있겠는가. 내가 만약 조그마한 성공이라도 이룬 것이 있다면 이는 우리 부모의 공덕이 5할이고 나머지 4할은 스승과 제자들을 비롯한 주변 친지들의 공덕이며 그 남은 1할이 내 노력의 대가라 할 것이다.

우리 어머니의 자식 교육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먼저 말투가 남달랐다. 속되거나 상스러운 말투를 쓰지 못하게 하셨으며, 때로는 남들과 다른 용어를 쓰도록 가르치셨다. 그래서 가끔 다른 애들 앞에서 곤욕스러웠던 경우가 생기기도 했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형을 언니라고 부르게 했던 것이다. 이것이 전통적인 상류사회 언어라는 것을 서울에 올라와서 백아 김 창현 선생이 일중 김 충현 선생을 언니라 부르는 것을 보고서야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그 말씀을 백아 선생께 여쭈어 보았더니 사실이 그렇다며 당신께서도 그런 경험을 하였노라고 그 정황을 이렇게 말씀하신다. 어느 때 버스를 탔더니 갓 쓰고 도포 입은 하얀 노인 두 분이 나란이 앉아 말씀을 나누는데 언니 언니 하며 다정하게 얘기 하더라는 것이다. 여기서 언니라는 용어를 당신 댁에서만 쓰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셨다고 한다.

백아 선생은 순조 부마인 창녕위 김 병주의 5대손으로 조선왕조 상류사회의 생활 규범을 철저하게 지켜온 집안 출신이시니 이 말씀을 통해 우리 어머니의 교육이 어느 기준 아래 이루어졌던가 하는 것을 가늠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각 명절마다 지켜야 할 세시풍속을 까다롭게 지키도록 가르치셨고 어느 날엔가는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유성기 소리도 못 듣게 하시며 높은 곳에 올라앉거나 무엇을 몸에 바르지 못하게 하셨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것이 팔관재계로 고려시대 이래로 지켜오던 불교 풍속이었다. 아마 이월 초하루 날 이었던 듯하다.

그리고 무슨 날만 되면 문 앞에 황토를 놓고 떡시루를 쪄서 고사를 지내면서 그 하루는 특별히 근신하도록 가르치셔서 대개 정월 한 달과 시월 한 달은 거의 근신하며 지내도록 하셨다. 이는 근신하는 것을 체질화하며 성장하도록 유도한 것이니 이것이 인격형성에 얼마만큼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을까 하는 것은 따져 볼 필요도 없다. 근신은 곧 자기 단속이자 남에 대한 배려이니 사람을 사람답게 살도록 하는 기본 교양이라 할 수 있는데 이를 체질화하도록 가르치신 것이다.

그리고 집 밖에 나가서 음식을 먹는 것을 금하셨다. 남의 잔치 음식은 물론이려니와 장에 나가 사 먹는 것조차 어린 나이에는 허용되지 않았다. 음식에 끄들리면 천격이라는 생각이 바탕으로 깔려 있는 교육이었지만 인내와 위생, 식구들 사이의 결속을 지켜내기 위한 기초 교육이기도 하였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집에 돌아올 때까지는 참아 내야 했으므로 자연스럽게 인내할 줄 알게 되었고 남의 음식을 아예 먹지 않게 되니 비위생적 음식에서 근원적으로 차단당하게 되었으며 음식은 반드시 식구와 함께 먹어야 했으니 식구 사이의 결속력이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현명한 가정교육이었다고 여겨진다.

위생문제에 있어서 또 하나의 철칙이 있었으니 아침에 이 닦고 세수하는 것이야 당연한 것이지만 잠자리에 들기 전에 반드시 세수는 물론 머리 감고 발 닦고 하는 목욕과정을 거쳐야 했다. 아무리 추운 엄동설한이라도 물을 데워 이 과정을 거쳐야만 잠자리에 들게 하였으니 우리 형제들은 이 시간이 되면 마치 방죽물에 뛰어드는 오리새끼 모양으로 차례로 물통으로 뛰어들게 되었다. 그 시절 보통 집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위생관념이 몸에 배어 나는 지금도 믿음이 가지 않는 음식점에서는 음식을 먹지 않고 매일 아침 목욕하는 것을 습관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여행을 가더라도 그 지방에서 가장 믿을 만하고 소문난 집을 찾기 위해 꽤 많은 시간을 허비하기도 하고 이를 확인하느라 이집 저집 들락거리다 눈총 받는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음식을 입맛에 맞게 먹으면서 즐기는 것이 문화 생활의 기본이라는 것을 어려서부터 몸에 익혀 왔기 때문에 이 문제만은 결코 양보하려 들지 않는다. 무엇을 먹든지 배만 채우면 된다는 사고 방식은 동물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야만적인 사고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은 쾌적하고 안락한 생활을 지속시켜 가는 것인데 이것은 의식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화려하고 사치스러워야 쾌적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소박한 재료와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해도 그 조화와 품격이 갖추어지지 않는다면 불쾌감만 증폭시켜 줄 뿐이다.

이런 나의 문화관은 사실 우리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내가 찾는 음식은 희귀한 재료로 이상하게 만든 값비싼 음식이 아니라 제대로 조리된 평범한 음식이다. 곧 몇천년 동안 우리 입맛에 맞도록 조리법을 계발해 내어 독특하고 고유한 우리 맛을 내도록 한 그런 음식이다.

과거에는 이런 음식을 우리 민족이면 누구나 다 만들어 먹고 살았다. 그런데 학교 교육을 통해 서양 음식의 조리법을 강요하고 서양 음식을 고급스런 것으로 우대하게 되니 우리 고유의 맛은 점점 설자리를 잃고 저급화되면서 그 참맛을 잃어가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구석엔가 틀어박혀 우리 맛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곳이 있다면 어찌 저녁 해를 다 보내가며 찾아 헤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의복도 그렇다. 지금 우리 옷은 거의 생명력을 잃고 있다. 양복과 양장을 양복이나 양장이라고 생각하면서 입고 있는 이들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양복이나 양장이라고 생각하면서 입고 있다면 우리 한복이 주인자리를 놓치지 않겠지만 그런 의식 없이 양복을 입고 있으니 우리 한복은 벌써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가는 듯한 느낌이다.

그러나 과거 고려시대 몽고 지배 80년 동안 몽고 풍속을 따르던 고려사람들이 몽고가 기울어 가는 기미를 눈치채고 공민왕이 고려 옷으로 바꿔 입자 전국민이 하루아침에 고려 옷으로 다시 바꿔 입었다는 역사 사실을 돌이켜볼 때 이런 현상이 한때의 세태의 반영이라고 보아도 무리는 없을 듯하다.

그러니 지금 세계를 단일화시키려는 허황한 꿈을 가진 미국이 기울어 가면 그 순간에 우리는 우리의 본 모습을 찾아 우리 의복으로 바꿔 입게 되리라 굳게 믿는다. 그렇게 되려면 우리 옷의 참모습을 지키고는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갑오경장에서 우리 옷의 품격을 많이 손상하여 그 참모습을 잃게 하였다. 상민의 옷으로 하향조정하였기 때문에 품위 있는 상류 사대부 사회의 옷이 사라진 것이다. 넉넉하면서도 품위 있고 생활에 편리했던 중치막, 도포, 쾌자 같은 덧옷이 사라지고 덧옷은 두루마기 하나만 남게 되었다.

남여나 수레, 말 들을 타지 못하게 되어 있던 상민들이 긴 덧옷의 좌우를 터놓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두루 막아 놓아 두루마기란 것인데 이것만 덧옷으로 인정한 것이다. 우리 민족 전체를 하층 계급으로 만들려는 일제의 저의가 평등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 아래 관철된 결과였다.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계급타파라는 사탕발림에 흥분하여 우리 문화를 저급화시키는 데 스스로 앞장서 왔었다. 그래서 한복이 단순화되고 저급화되는 길을 걸어 품위를 잃고 생활에 불편함을 느끼게까지 타락하게 되었다. 남자의 저고리 기장이 짧아지고 바지통이 좁아져서 모양새도 없을뿐더러 겨울 추위에 제 구실을 못하게 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고 깃과 섶이 짧고 좁아져서 답답하게 목을 옥죄이니 촌스럽고 초라하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나라가 망해 가는 급박한 상황에서 천 한 조각이라도 아껴야 하는 형편에서 이렇게밖에 할 수 없었다면 얘기가 되지만 그런 형편에서 벗어난 지금에 와서도 이런 망국 복식을 전통 의제라고 고집해서는 안 된다. 이제는 우리 전통 의복이 자존의식을 가지고 절정에 이르는 발전을 보였던 시기의 의복제도로 되살려 낼 때가 되지 않았나 한다. 품위도 있고 생활에도 편리하고, 그래서 쾌적한 느낌이 최고조에 이르는 그런 의복으로 말이다.

나는 이런 의식을 우리 부모로부터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받으면서 자라왔다. 그래서 이를 몸소 실천하며 체계적으로 관철시켜 나갈 뜻을 항상 품고 살아왔다. 대학 입학식에 한복을 정장으로 차려 입고 나간 것도 그런 의지의 표출이었다.

이후 평생 우리 옷을 입고 살면서 그 장단점을 점검하며 편의성과 품위의 증진을 위해 끊임없이 그 제법의 개량을 요구해 오고 있다. 그래서 갑오경장 이후에 굳어 버린 우리 옷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을 계속해 가고 있다. 그 결과 두루마기는 좌우를 터서 차를 타거나 의자에 앉는 데 편리하도록 하고 깃과 동정, 섶을 넓고 길게 하여 넉넉하고 편리하게 환원하였으며 저고리 기장도 훨씬 길게 하여 앉으면 엉덩이 아래를 내리 덮게 하였다. 이때 저고리 하단이 뒤집히거나 깔려 들어 답답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역시 좌우를 깊게 터서 앞뒤 폭이 따로 놀게 할 필요가 있다.

어떻든 이렇듯 문화의 기반이 되는 의식주에 대해서 우리 전통을 지켜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체질화함으로써 이를 역사사실을 통해 논리적으로 해명해 나가는 학문에 종사하게 된 것은 유년시절 우리 부모의 가정 교육 덕택이었다. 그래서 내 학문의 성취가 그 반은 우리 부모님의 공덕이라 했던 것이다.


<샘이깊은물> 2001. 9

최 완수/1942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했다. 현재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연구실 실장으로 있으며 한국교육방송의 <최완수의 우리문화 바로보기>에도 출연, 강의를 하고 있다. 책으로 <겸재 정선 진경산수화>, <겸재를 따라가는 금강산여행>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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